1. 서  론


  우리가 익히 들어 잘 알고 있는 ‘전쟁의 역사는 곧 인류의 역사다’라는 문구는 곧 인류의 역사가 전쟁과 함께 해왔음을 시사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최초의 전쟁이 언제부터 있었는지 에 대한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다. 대다수의 역사학자들은 현재까지 밝혀진 여러 역사적 사실들을 통해 최초의 전쟁은 구석기 시대부터 있었음을 주장한다. 구석기인들이 사냥을 위해 창ㆍ불ㆍ돌ㆍ몽둥이를 사용한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 무기들이 집단 간의 불화와분쟁을 해결하기 위한 폭력수단으로서 사용되었으리라는 것은 발굴된 몇몇 고대 인간의 두개골에서 추측할 수 있다. 비록 구석기 시대 후기의 유적지를 제외하면 조직화된 전쟁에 관한 확실한 증거는 별로 없지만, 앞서 말한 증거들을 종합하면 적어도 구석기 시대의 끝 무렵엔 나타났음을 알 수 있다.

  전쟁은 구석기에서 출발하여 중석기, 신석기를 지나 비로소 문명이라고 부를 만한 메소포타미아-이집트 문명을 거쳐 그리스-로마, 중세, 근대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갖가지 형태로 반복되어왔다. 그러나 태초의 전쟁 형태가 집단 간의 불화와 분쟁을 해결하기 위한 목적 위주이었음에 반해, 거대화된 문명간의 무력충돌은 전쟁이 단순히 갈등해소의 목적으로만 사용된 것이 아니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클라우제비츠1) 는 전쟁의 목적이란 정치적인 목적을 수행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집단 간의 대립을 넘어 정치적 행위의 가장 극단적인 형태로 본 것이다. 이어 그는 전쟁을 적의 타도를 목적으로 하는 전쟁과 국경지대에서 몇몇 지역의 정복을 목적으로 하는 전쟁으로 분류하였다. 전자가 적을 정치적으로 격멸하여 방어불능 상태로 만든 다음 아군 측에 유리한 평화를 강요하는데 목적이라면, 후자는 적의 지역을 점유하여 점령지역을 유용한 교환수단으로 활용하거나 평화협상에 활용하는데 목적을 두었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고대 전쟁의 목적은 클라우제비츠의 정의와는 약간 차이가 있다. 통치자들은 점령지를 외교의 수단으로 사용하기 보다는 직접 통치하는 방법을 택했는데, 이는 점령지가 곧 부로 직결되었기 때문이었다. 군사를 일으켜 상대 국가를 자국의 영향력 아래에 둔다면 발달된 문명은 물론이고 비축된 곡식과 개간된 농지, 그리고 노예와 군사를 얻을 수 있었다.

  우리는 고대 전쟁의 목적을 충실히 이행한 로마의 예에서 그 흔적들을 찾아 볼 수 있다. 로마가 자리 잡은 이탈리아 반도는 그다지 풍족한 지역이 아니었다. 또한 불어나는 인구에 비해 영지는 비좁았으며, 금속이나 광물 혹은 가공물의 생산도 적었다.

  하지만 로마는 아테네처럼 인구증가에 따른 식량공급지를 찾을 필요가 없었다. 근처의 비옥한 땅들을 전쟁으로써 차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연히 국가의 정치적 성향은 호전성을 띄었고, 지휘 층은 대농장과 농민들에게 토지를 공급하는 일로 머리를 썩일 필요가 없었다. 이렇게 정복에 의해 부를 증가 시켜 나갈수록, 로마 공화국은 점차 제국의 형태로 변형되었다.그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는데, 로마는 전혀 얘기치 못했던 전쟁이건 혹은 자발적으로 일으킨 전쟁이건 간에 끊임없는 교전을 수행해야했다. 교전에서 매번 승리하기 위해서는 능률적이고 믿을 수 있는 병력을 지속적으로 제공할 수 있는 원천을 확보해야 한다는 군사상의 어려움이 있었다.

  기존에 존재하던 병역의 의무가 포에니 전쟁(기원전 264~146) 무렵에 완전히 붕괴되자 로마 군단은 딜렉투스라고 불리는 선발과정을 만들었다. 딜렉투스는 자발적으로 군대에 지원한 시민들 중에 최상급 판정을 받은 사람만 6년 동안2) 복무할 수 있었다. 또한 전술을 축적시키고 전투력의 손실을 방지하기 위해 장기 복무하는 부대장을 선출하는 백부장 제도가 있었기에 로마의 군대는 더욱 강해 질 수 있었다. 하지만 로마군이 강해질 수 있었던 이유는 오래부터 내려온 군사 제도적 측면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로마는 기원후 21년 제국의 판도 내에 있던 모든 자유민에게 시민권을 확대함과 동시에 도로, 교량, 수로, 댐, 무기, 막사, 공공건물 등 탄탄한 하부구조를 구성하는데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로마가 성립 당시부터 전쟁을 최우선 과제로 삼고 성립되었다고는 잘라 말할 수 없다. 그러나 든든한 하부구조가 있었기 때문에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고, 뒤집어서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하부구조를 튼튼하게 구축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전쟁이 그들의 정치적ㆍ경제적 체계를 발전시키는데 큰 영향을 끼쳤기 때문에 모든 민족들을 능가하고 역사에 길이 남을 수 있었던 것이다.

   덧붙이면 전쟁의 목적을 수행하기 위해 개발된 것이 국가 발전의 촉진제가 된다고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로마인들이 건설했던 방대한 가도가 있다. 로마인들은 가도를 건설할 때 방벽을 같이 설치했다. 적으로부터 영지를 보호하는 역할과 동시의 도로의 기능을 수행한 셈이다. 가도는 우선 군단의 신속한 이동을 목적으로 하는 군용도로로서의 기능을 충족시키면서, 도시 한복판을 관통하는 도로를 건설하여 주민들도 이용할 수 있게 하는 것에 목적을 두었다.

  로마가도는 평탄하고 포장되어 있었으므로 이동이 쉬워지고 수레에 더 많은 것을 실을 수 있었다. 사람과 물산의 유통이 늘어나면 자급자족이 주류를 이루던 생활에서 상업적인 생활로 발전한다. 그것은 곧 도로 주변에 사는 주민의 생활수준이 향상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로마의 가도는 ‘로마의 전략’임과 동시에 곧 ‘로마의 정치’이기도 했다.

  이는 군사적 목적을 위해 제작되어진 것들이, 비단 전쟁의 양상만 바꾸는 것이 아니라 국가의 정치ㆍ경제ㆍ문화 체계에 영향을 끼친다고 생각할 수 있다. 특히 전쟁은 현대사회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매우 중요한 과제이기 때문에,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개발된 발명들이 장차 우리의 삶을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가져오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과거의 기록들을 살펴보아 전쟁을 위한 발명들이 민간인들의 삶에 어떤 식으로 파장이 미쳤는지 알아야 한다.

  이 글은 위와 같은 생각에서 출발하여 각각 중세시대 초기와 후기에 나타나 전쟁의 본질을 뒤흔들고 나아가 새로운 사회를 등장시킨 두 가지 발명, 등자와 화약에 대해 논해보고자 한다.



  2. 등자


  전투에서 말을 이용한 역사는 3단계로 나뉜다. 첫 번째 단계에서는 말을 전차에 이용하였다. 두 번째 단계에서는 전사가 말을 타고 무릎을 말에 밀착시켰다. 마지막 단계에서 전사는 등자를 갖추어 말을 탔다. 등자가 발명된 것은 드디어 전사가 말 위에서 전투다운 전투를 할 수 있게 되었음을 말한다.

  등자가 도입되기 이전에는 기수의 자리가 불안정했다. 재갈과 박차는 기수가 말을 통제하는 데는 도움이 되었지만, 효과적인 전투를 하는 데는 부족했다. 등자가 없는 단순한 안정에선 힘의 분배가 불안정했으므로 칼을 크게 휘두를 수 없었다. 왜냐하면 등자 없이 기수가 적에게 칼을 크게 휘두르면 낙마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에겐 칼과 창보다는 기동력을 가진 활 또는 투창이 쥐어졌다.

  하지만 등자가 등장하면서 기존의 전투방법을 완전히 뒤바꾸어 놓았다. 말의 빠른 기동력을 이용하여 원거리에서 공격한 후 적에게 공격받기 전에 후퇴하는 전술에서, 말을 탄 기사가 공격력의 핵심으로 변하였다. 등자가 전후좌우의 지탱력을 생기게 하니 말과 기수가 일체가 되어 유례없이 강력한 전투력을 발휘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기수는 더 이상 활과 투창이 아닌 자신의 키보다 큰 창을 겨드랑이에 끼워 적에게 돌진했다. 단순한 팔의 힘만이 아니라 자신과 돌진하는 말의 체중을 함께 실어 적을 타격하는 기마충격전이 가능해진 것이다. 이 혁명적인 전투법이 전사의 살상력을 상당히 높인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그렇다면 등자는 언제, 어떻게 유럽에 도입되었을까?


    가. 등자의 등장시기

  등자의 원형은 기원전 2세기 말 인도에서 찾아볼 수 있다. 산치(Sanchi)3) , 파타오라(Pathaora), 바자(Bhaja), 마투라(Mathura)의 조각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그것은 느슨한 뱃대끈으로 기수가 뒤에 발을 걸치는 형태였다. 말의 목 아래와 허벅지부터 엉덩이 까지 끈으로 두르고 등에는 안장을 얹은 모양인데, 후에는 엄지발가락을 걸치는 등자가 등장했다. 하지만 이 등자는 신발을 신은 기수는 착용할 수 없는 단점이 있었다.

  각 지역마다 자신들의 필요의 맞게 개량하던 중, 발을 걸치는 등자의 초기형태는 중국에서 등장한다. 가장 일찍 등자를 언급하는 중국 문헌은 BC 477년 것으로, 등자가 당시 일반적으로 이용되어 있다고 서술한다. 고대의 실크로드를 따라 인도에서 중국으로 전해진 등자의 아이디어는 중국에서 개량되어, 다시 실크로드를 통해 중앙아시아의 유목민족들에게도 전파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지리상으로 상당히 떨어져 있었던 서유럽에는 어떻게 전파되었을까?

  우리는 그 해답을 비잔틴 인들에게서 찾을 수 있다. 비잔틴 인들은 유목민족과 항상 접촉했고 이러한 유목민족이 비잔틴의 전법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는 점에 주목해야한다. 그러므로 등자가 아시아의 대초원을 경유해서 흑해 북해 지방에 퍼졌고, 그 전후 콘스탄티노플에도 전해졌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비잔틴에서 서유럽으로 보급되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물증이 나타나지 않는다. 중세 초기의 모든 기독교 국가의 화가 중 몇몇을 제외하곤 주변에서 관찰할 수 있는 대상을 묘사하는데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당시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예술품중 등자의 모습을 찾아 볼 수 있는 것은 없다. 그러므로 서유럽에 등자가 도입된 시기를 파악하려면 미술사보다 고고학적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 그 시기는 8세기 초, 샤를 마르텔의 시기로 추정된다. 프랑크군 특유의 전투용 도끼인 프란키스카4) 와 미늘 달린 투창인 앙고가 이 시대에 자취를 감추었다. 대신 창날 밑 부분에 무거운 받침대와 돌기가 있는 창이 널리 이용되었는데, 이런 창은 도로 빼내기 어려울 정도로 상대방을 깊이 찌르는 것을 방지하려는 것이었다. 등자가 도입되기 이전에는 적의 몸에서 창을 빼내기 어려울 정도로 적을 깊숙이 찌를 수 없었다. 반면에, 등자를 갖춘 기병은 창을 내려 겨드랑이에 끼워서 자신과 말의 체중을 전부 실어 찌르기 때문에 창이 상대방에 깊게 들어가 빼내기 어려울 경우가 종종 발생했을 것이다. 그래서 깊이 박히는 것을 방지하는 장치를 달아야 했던 것이다. 바로 이 무기의 변화가 샤를 마르텔의 시대였던 점을 감안하면, 등자는 적어도 8세기에 기마충격전에서 매우 중요하게 인식되었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다.

  등자의 발명은, 기존에 발명되었으나 그다지 주목받지 못하다가 알 수 없는 어떤 이유로 인해 깨어나 마침내 어떤 문화를 형성하는 핵심요소가 되는 수많은 역사의 예 중 하나이다. 등자가 프랑크인들에게 꽤 오래전에 알려졌으나 샤를 마르텔에 의해 등자의 잠재력이 발휘된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역사에서 어떤 새로운 발명이 어떤 이들에게는 새로운 세계로 이끄는 길잡이가 되기도 하고, 또 다른 이들에겐 단지 문을 여는 열쇠에 그친다는 것을 배웠다. 예로 비잔틴제국은 등자를 먼저 받아들여 서유럽에 전파하는 징검다리 역학을 했음에도 뒤늦게 프랑크왕국으로부터 등자를 이용한 기마충격전을 받아 들였다. 이는 발명품이 수용되어 그 진정한 힘이 발휘되기 위해서는 발명품 자체의 성격도 중요하지만 사회의 상황과 지도자의 상상력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프랑크 왕국의 샤를 마르텔만이 등자의 잠재력을 완전히 파악해서, 우리가 현재 봉건제라고 부르는 새로운 사회구조에 의해 지탱되는 신식 전투법을 창조해냈다.


    나. 등자의 등장으로 인한 봉건제의 등장

  등자에 의해 가능케 된 새로운 전투법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전문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전투 엘리트들이 요구됐다. 하지만 필요한 만큼의 기병을 유지하기 위한 비용이 상당히 부담되었다. 전투에 나가기 위해 갖추는 무장은 기마충격전의 위력에 대처하기 위해 점점 무거워져야 했다. 또한 말은 중무장을 한 기사를 태울 수 있을 만큼 튼튼해야했고, 공격 시에는 질주가 가능할 정도로 특별한 양육과 훈련을 받아야 했다. 761년 이산하르드(Isanhard)라는 사람은 상속받은 토지와 노예 한 명을 팔아 말 한 필과 검 한 자루를 구입했다. 일반적으로 어떤 이가 기사 장비를 완전히 갖추는데 대략 소 20마리, 혹은 농민 10가구가 사용하는 농마에 상당하는 금액이 필요했던 것 같다. 게다가 겨울철의 사료나 마구를 대는 일도 만만치 않았고, 기사는 최소 두 명의 종자를 데리고 있어야 했다. 한명은 기사의 갑옷 시중을 들어야했고, 다른 한명은 말을 돌봐야했던 것이다. 전쟁터에 나가면 말이 죽는 경우도 있었으므로 여분의 말이 필요했으며, 기사의 종자도 시중업무를 들기 위해 말이 필요했다. 말은 상당히 많은 곡물을 소비했는데 단위면적당 생산량이 현대에 비해 현저히 뒤떨어지는 중세시대에는 심각한 문제였다.

  샤를 마르텔은 모든 자유민에게 경제적 지위와 상관없이 무기를 휴대할 권리와 의무를 주었다. 하지만 그들의 본디 직업은 농민이었으므로 기사들과 같이 중무장을 갖출 수 없었다. 자연 전투력은 약했고, 여러 이민족과 끊임없는 전투를 벌이게 되니 전투만 전문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기사들의 필요성이 다시 강조되었다. 샤를마뉴시대에 이르면 부유하지 않는 자유민들을 소유한 토지 면적에 따라 조를 묶어 그들 중 한명을 기병으로 무장시켜 출정에 나서게 했다. 이는 샤를마뉴가 얼마나 기병을 중히 했는지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조치는 관리가 어렵다는 이유로 인해 사라지고 만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이런 조치가 취해진 것은, 특정계급이 군사적 봉사를 전담해야 한다는 인식이 내포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는 후에상비군 제도가 마련되는데 밑거름이 된다. 기사들이 비전문 병사들이 할 수 없는 기마충격전을 소화해내기 위해선 뛰어난 신체조건과 장기간의 훈련이 요구되었다. 기사들의 일정은 훈련과 출정이 끊임없이 반복되었으므로 전혀 생산과 관련된 업무를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위에서도 말했듯 말과 무장을 유지하는데 엄청난 비용이 들었으므로 그들을 고용한 왕국에서 일정한 보수를 지급해야했다.

  당시 프랑크 왕국은 물물교환에 가까운 빈약한 시장경제와 중앙정부에 의한 세금징수조차 어려운 정치체제로 인해 그들에게 줄 수 있는 것은 토지 밖에 없었다. 이에 대한 샤를 마르텔과 그의 후계자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조치는 교회령을 몰수해서 군사적 의무를 봉사한다는 조건으로 기사들에게 봉토를 나누어 주었다. 이러한 토지의 급여는 토지의 모든 권리를 영구적으로 완전히 양도하는 것은 아니었다. 봉토를 받은 대상에게 토지에 대한 수조권이나 용익권과 같은 여러 권리들 중 일부를 잠정적이며 조건부로 대여하는 형태였다. 그래서 기사들이 봉토를 받은 이상 수여한 왕 혹은 영주에게 충성을 맹세해야했다. 기사들의 의무는 전투하는 것이며 이런 군사적 봉사를 다하지 않거나 혹시 수행할 수 없는 입장이 되면 봉토를 몰수당했다. 봉토는 세습되었지만 기사 봉사의 의무를 수행할 수 있는 사람으로 한정되었다. 미성년자의 후견에 관한 규칙, 과부 혹은 여성 상속자에게 결혼할 것을 규정하는 것 등은 봉토를 받은 대가로 군사적 의무를 수행하도록 하기 위한 조치였다. 이렇게 기사봉사의 의무는 봉건제의 핵심이자 시금석이다. 기사봉사의 의무를 통해서만 봉건제의 실체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기사운용은 ‘부’에서 출발하였으므로, 그들의 전쟁에 나가 승리하고 돌아올수록 부유해지는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반대로 그것은 경제적인 이유로 전투를 수행할 수 없는 자들의 사회적 지위가 불안해지는 것을 의미했다. 808년의 칙령인 확대법령「De execritu promovendo」에서 자유민과 빈민을 구분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대다수의 농민대중들은 사회의 변두리로 밀려났으며, 기사계급이 새로운 중심으로 떠올랐다.

  프랑크 제국 붕괴 이후에는 왕국에 충성을 맹세하고 군사의무를 다하는 형태에서 영주에게 봉토를 수여받고 봉사하는 형태로 변화하게 되었다. 비로소 기사들이 전투 엘리트만이 아니라 통치엘리트가 된 것이다. 이는 가신들이 상당한 토지를 소유하고 됨으로써 기사를 거느릴만한 여유가 생겼다는 것을 의미한다. 위로부터는 왕권이 지속적으로 봉건 영주에게 양도되고 있었고, 아래로부터는 하층민들이 자발적으로 복속해 들어오고 있었다. 혼란의 시기에 권력을 다투는 이들은 유능한 전사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봉토를 하사했다. 더 이상 기존의 자유민 징집은 필요치 않았다. 결국 전사 귀족과 농민대중 사이에는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관계가 생겨났다.


    다. 서유럽에 확산된 등자와 봉건제

  봉건주의적 사회형태는 카롤링거 왕조의 팽창에 따라 유럽전역에 퍼졌다. 새로 카롤링거 제국으로 편입된 지역들에서도 카롤링거 제국의 전투 방식과 봉건제가 도입되었다. 예로 이탈리아에서 나타난 봉신제와 봉토의 봉건적인 결합도 샤를마뉴의 정복 결과 도입된 것이었다. 그러나 프랑크 왕국의 제도와 생활 방식이 침투하지 않은 지역에서도 프랑크 왕국의 전투방식만은 중요시 되었다.

  비잔틴 제국, 동지중해 연안 지방의 이슬람 족과 에스파냐에 있던 무어인들이 프랑크 왕국의 전투방식들을 받아들인 예가 대표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특히 프랑크의 군사 기술과 그 사회 문화적 부수 효과가 가장 잘 발휘된 사건은 노르만족의 잉글랜드 정복이었다. 앵글로색슨 족은 등자를 알고 있었지만, 전법을 변화시키진 않았다. 정치체제도 메로빙거 시대의 갈리아처럼 영주제의 요소가 있었을 뿐 봉건제의 경향 혹은 기사라는 전투엘리트들의 모습은 없었다. 마상에서 창을 꼬나들고 돌진하는 것이 아닌 말로 전투지까지 이동한 다음, 말에서 내려 방패 벽을 구축하고 도보로 전투했다. 구식 전투법을 여전히 사용하던 앵글로색슨족은 11세기 전법인 기마충격전을 들고 전쟁에 나선 노르만족에게 일방적 학살을 당했다.

  이때 노르만족의 위대한 지도자 윌리엄은 영국 왕이 되자마자 근대화, 즉 봉건화했다. 물론 앵글로색슨족의 제도들 가운데 목적성에 부합하는 것을 보존시켜 앵글로-노르만 질서로 융화시키는 것을 잊지 않았다. 하지만 대체로 혁신은 보존보다 뛰어나기 마련이라, 윌리엄왕은 발달된 11세기의 봉건조직을 이용하여 당시 유럽에서 가장 강성한 국가를 건설할 수 있었다.

  11세기 말의 잉글랜드는 외부 군사 기술의 갑작스런 도입으로 사회 질서가 붕괴된 예이다. 노르만족의 잉글랜드 정복은 곧 잉글랜드의 혁명이기도 했다. 중요한 것은 대륙에서 이전 10세대 동안 단계적으로 발전된 혁명이 도버 해협을 건너 확산된 것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사실 등자만큼 단순한 발명도 드물다. 그렇지만 등자만큼 역사에 촉매작용을 한 발명 또한 드물다. 등자로 인해 전쟁양상이 완전히 뒤틀어졌으며, 새로운 전투법의 필요에 의해 전문화된 전사들을 필요로 했다. 전사들을 다루기 위한 자금을 충당하기 위해 토지를 수여했고, 이들은 곧 귀족 기사가 되어 사회를 지배하는 계층이 되었다. 기존에는 없던 새로운 서유럽 사회형태의 등장이었다. 필연적으로 이 귀족들은 기마충격전의 형태와 그 사회적 태도에 부합하는 문화형태와 사고방식을 발달시켰다. 말을 탄 남자, 이들이 중세초의 유럽의 패권을 지니었다.



  3. 화약


  기사의 등장 이후, 중세 사회는 위계적 사회질서 즉 봉건제도가 자리 잡게 된다. 이런 사회질서는 오래전부터 천천히 굳어버려 그 누구도 자신의 사회적 신분에 대해 문제를 제기 하지않았다. 봉건사회는 계층 구분이 매우 엄격하여 개인이 이러한 계층 간의 벽을 뚫는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주로 특권을 지닌 층은 귀족들이었는데 이들은 태어나면서부터 특권을 가지게 되는 세습귀족과 특출한 전투실력으로 인해 귀족이 된 전사귀족으로 구분지어 진다. 이들의 공통점은 봉토를 가지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자연히 토지를 소유한 귀족중심으로 지역이 편성되기 마련인데, 이를 장원이라 일컫는다.

  장원은 로마 대농장의 영향을 받아 농촌의 자급자족적인 경제단위를 이루었다. 영주들은 농노들에게 일정량의 농토를 떼어주었고, 거기에서 경작되는 농산물들을 받았다. 농노들은 종종 영주의 지시를 받아 부역을 해야 하기도 했다. 농노들의 노동력과 같은 기본 권리는 모두 영주에게 예속되어 있었다.

  대신 영주는 자신의 재산을 보호해야 했으므로 외부세력이 침입하지 못하도록 기사들을 고용하는 한편, 성을 축조했다. 군사 행정 관리를 위해 축조한 성은 시민들의 안전을 보호하면서 영주들의 세력과 권위를 나타내주는 가시적 상징물이었다. 절대권위가 약화된 중세 중후반 영주들은 과시의 목적으로 앞 다투어 성을 지었다. 독일의 공작 프리드리히 2세는 “타고 가는 말의 꼬리에 성을 달고 다닌다.”는 말이 생길 정도로 성을 많이 지었다. 각 지역들은 성을 중심으로 통치되었다. 특히 봉토에 묶여있는 기사들의 거주지가 있는 작은 성들이 그러했다. 이렇듯 중세의 모든 세력과 경제, 정치는 성을 중심으로 편성되었다.

  하지만 중세 후반에 도입된 화약으로 인해 성은 몰락했다. 화약의 제조 방식이 처음으로 공표되었을 때, 그 공식은 군인들의 이목을 끌진 못했다. 이후 장거리에서 타격하는 대포 앞에 기사와 성은 힘없이 무너진다. 이것은 장원제의 몰락, 새로운 시대가 들어섰음을 의미하는 바이다.


    가. 대포의 등장

  서유럽에서 화약 제조법을 처음으로 기록한 사람은 잉글랜드의 수도승은 로저 베이컨5) 이었다. 그 공식은 1260년 그의 저술인 「De Secretis Operibus Artis et Naturae et de Nullitate Magiae」에 기록되어 있다. 초석과 목탄과 유황을 순서대로 7:5:5의 비율로 혼합하면 된다고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베이컨은 교회가 두려워 이 공식을 암호와 수수께끼 글자로 바꾸어 놓았다.

  그로부터 최소한 50년이 지난 후에야 최초의 대포가 등장했다. 초창기의 대포는 쇠를 단련하여 제작되었기 때문에 매우 위험했다. 몸통이 불룩하고 목이 가는 항아리처럼 생긴 관에, 금속 깃이 달린 대형 석궁식 화살 모형의 대포알을 장전하여 발사했다. 하지만 대포에 불을 붙일 때 내용물이 나가지 않고 그 자리에서 폭발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이후 대포는 종처럼 주조 방식을 사용한 뒤에야 안정성을 가지게 되었다.

  최초의 대포가 발사된 사례는 1324년 프랑스의 메스 전투6) 이다. 확실한 기록이 없어 의견은 분분한 상태이지만, 이 시기를 뒤로 하여 전쟁에서 대포를 사용한 기록이 여러 곳에서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이 시대에 대포가 전쟁의 한 축으로 자리 잡았음은 분명하다. 이런 증거들은 에드워드 3세가 1327년 베릭7) 에서 스코틀랜드와 싸울 때나, 프랑스군이 1340년 케누아8) 에서 잉글랜드군에게 화살을 발사하기 위한 대포를 사용한 기록 등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대포의 필요성을 절감한 에드워드 3세는 대포 100문을 만들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화약의 강도가 약했고 명중도가 낮았기 때문에 전쟁 수행의 진정한 목표를 달성하진 못했다. 당시 대포가 지닌 힘은 활과 석궁보다 화살을 훨씬 멀리 보낼 수 있다는 심리적인 압박감과 먼 사정거리를 보유한 무기라는 점에 불과했다.


    나. 화약이 변화시킨 전쟁의 양상

  기사들은 전투에서 근접전을 벌였다. 기사들이 마상에서 중무장을 한 채 발휘하는 기마충격전은 여전히 위력적이었다. 기사들은 잉글랜드에서 최초의 보병혁신이 있기 전까지 서유럽의 주력 전투력이었다. 하지만 대포의 등장으로 이런 양상은 완전히 뒤바뀌게 된다.

  성은 흔히 산꼭대기나 산등성이에 위치한다. 높은 위치를 점함으로써 전투에서 지리적 이점을가져올 수 있었다. 이점들이란 적이 다가오는 것을 정찰하기에 용이한 것과 협소한 자리 때문에 적이 공성용 무기를 제대로 구축하는 것이 어려운 것들을 말한다. 성 앞에 판 해자와 가시철조망, 울타리 따위는 기사들의 돌진을 봉쇄했다. 그래서 공격군은 성을 포위하려다 적당한 위치를 잡지 못하고 오히려 역습을 당했다.

  그렇지만 성안의 방어군은 개량된 대포의 위력 앞에서는 손을 들 수밖에 없었다. 웨일즈 동북에 위치한 플린트 지방의 성과 같이 몇몇 성들은 서너 겹의 튼튼한 성벽으로 이루어져 대포의 위험으로 피하려고 했지만, 15세기에 이르면 더 이상 점령 불가능한 성은 없어진다. 왜냐하면 성 안에 있는 무기의 사정거리는 대포에 훨씬 못 미쳤기 때문에, 공격군은 안전한 거리에서 위험을 무릅쓰지 않고도 성을 공격할 수 있었다. 영주들은 대포의 막대한 영향력을 깨닫고 앞으로의 전투 양상이 변화할 것을 예감했다. 더 이상 기사들이 지금껏 행해온 전투와 사회적 지위는 미래가 불투명했다.

  사실 성의 종말보다 기사의 몰락은 더 빨리 찾아왔다. 기사들의 기마충격적은 근접전에서 매우 효과적이었지만, 그만큼 혹독한 훈련과 자신의 몸무게보다 무거운 장비를 착용해야했다. 자연히 이들의 평균연령은 50살 전후로 그리 오래 살진 못했다. 초인적인 육체능력이 강요되는 전투법은 연령층이 낮을 때만 완전히 발휘되기 때문에 이는 전투력을 지속적으로 유지하는데 약점이 되었다.

  더군다나 당시의 전통적인 군대, 즉 여름에 단기복무만 하는 기병대로는 효율적인 작전전개가 불가능 했다.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1세는 이런 군사체계로는 결코 웨일즈의 산악인들을 정복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는 연중 복무하기로 계약한 직업군대를 고용함으로써 해결했다. 군대의 직업화는 용병의 의존도가 커지면서 시작되었다. 사실 웨일즈의 상황에서는정상적인 봉건제 군대를 운용하는데 적합지 않았다. 이에 에드워드 1세는 징용방법을 완전히 포기하고 전문화 ∙ 체계화된 군대를 갖추기로 했다.

  징용문제에 대한 에드워드 1세의 해결책은 그의 봉건제 소작인들로 하여금 병역 대신 병역면제세를 내도록 했다. 거둔 세금으로 전투에 전문화된 용병을 구입했고, 병역 면제세를 내지않는 소작인들에게는 수는 적어도 질이 우수한 병력을 보내도록 했다. 이들은 군복무 기간이 만료되면 일정량의 보수를 지급받기로 계약했다. 통치자의 지휘 아래 공통된 훈련을 받으며 항시 전투를 수행할 수 있도록 준비되어 있는 상비군들은 기사의 입지를 더욱 더 좁게 했다.

  기사의 입지를 좁게 한 것은 그들의 기사도 정신에도 문제가 있었다. 기사도 정신에 입각한 전투는 격렬했지만, 비겁한 방법은 일체 배제 되었다. 전략적 술책이나 함정, 기습 등은 멸시되었고, 정정당당한 결투를 하는 것과 같이 끝까지 싸워 남는 쪽이 최후의 승리자가 되었다. 적의 대열을 무너뜨려 대오를 지시하는 깃발을 무너뜨리면 승리할 수 있었고, 패자는 패배를 인정하고 항복하면 전멸을 피하고 명예롭게 퇴각할 수 있었다.

  어쩌면 안일하게까지 느껴지는 이들의 전투방식은 스위스의 장창병과 잉글랜드의 장궁병에 맞서 무너지게 된다. 1346년의 크레시 전투9)에서 잉글랜드군은 프랑스군을 맞아 큰 피해 없이 기사 천오백 명을 죽이는 성과를 거둔다. 14세기에 처음 발명된 총은 점차 완성도가 높아진다. 1500년 직후 새롭게 등장한 머스캣 총으로 인해 모든 사람이 전투를 쉽게 수행 할 수 있는 방법이 생겨나자, 시대에 뒤떨어지는 기병대는 일거에 보병으로 대치된다.


    다. 봉건제의 몰락과 절대주의의 등장

  우리는 어떤 사회를 지탱하고 있는 제도와 계급이 무너졌을 때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큰지 잘 알고 있다. 중세시대의 봉건제도와 그것의 버팀목이던 기사계급이 몰락할 즈음, 전 유럽은 각지에서 끊이지 않는 분쟁으로 매우 혼란스러웠다.

  특히 프랑스의 경우 영국과의 백년전쟁을 겪으며 궤멸적인 타격을 입는다. 강력한 지방 영주들은 무능한 국왕으로부터 이탈하여 영국과 동맹을 맺고 자신의 이익을 도모했다. 그 중 부르고뉴의 이탈은 가장 치명적이었다. 부르고뉴공은 1419년에서 1435년까지 영국과 동맹을 맺었다. 이런 점에서 프랑스의 왕권은 그 밑에 영주들을 하나로 묶을 힘도 없을 만큼 빈약했다.

  1429년, 샤를 7세 앞에 나타난 잔 다르크로 인해 드디어 영국군을 프랑스 땅에서 추방했을 땐10) 왕권은 이전과는 다르게 크게 신장되어 있었다. 전쟁이라는 비상사태는 왕에게 세금을 징수하고 상비군을 유지할 권리를 주었다. 이것은 농촌과 상업의 변화가 뒷받침 된다.

  빈약한 생산력으로 기근을 면치 못하던 농민들은 삼포제와 작물 개량의 방법을 통해 생활조건이 훨씬 좋아졌다. 이들은 잉여 생산물을 판매하여 돈으로 자유를 살 수 있었다. 영주들은 자신의 영지를 보유만 하고 경작지로 활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농노들을 일부러 해방시켜 지대를 챙겼다. 지대는 통상 농노의 전 재산보다 많은 현금을 얻게 해주었다. 현금의 유통은 도시의 성장과 동시에 상업의 발달을 촉진시켰다. 도시 내부에는 중요한 수공업자들이 살고 있었다. 이들이 제작하는 물품들은 모두가 필요로 했기 때문에 자연히 시장이 형성되었고,상인들은 여러 성을 다니며 다양한 물품을 장터에 내다팔았다. 시장이 형성된 것은 농촌중심의 자급자족경제에서 상업경제로 발전된 것을 의미한다.

  예전보다 부유하게 된 농민과 상인들은 일정량의 세금을 내며 병역의 의무에서 벗어났다. 뒷받침되는 재정으로 잘 훈련된 상비군들을 갖추게 된 왕권은 국내의 저항 세력을 완전히 제압할 수 있었다. 특히 대포는 반란 귀족들이 돌로 쌓은 성 안에 은신하기 어렵게 함으로써 군주제를 강화시켜 주었다.

  국왕들은 중앙집권적 국가통치의 실현을 위해 귀족들을 철저히 복종시켰다. 이들에게 봉토대신 봉급을 지급함으로써 관료제의 기틀을 마련하였는데, 이는 왕권아래 통일된 정책의 시현이 가능하게 됨을 의미한다. 그 동안 쌓여있던 주요 국내 문제들이 해결되자 지배자들의 눈은 자연스럽게 대외로 향하게 된다. 

  정리하자면 그간 중세 사회는 오랜 봉건적 관습으로 인해 사분오열되고 왕권이 추락하는 굴욕을 맛봐야했다. 이때 등장한 대포와 머스캣은 반역적인 기사귀족과 성을 차례차례 함락시키면서 혼란의 시대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로 인해 왕권 중심의 절대주의시대가 개막되었고, 국가라는 이론적이고 추상적인 개념을 소속된 국민에게 심을 수 있었다. 또한 안정을 찾은 국왕들의 시선을 해외로 옮기면서 끝없는 호기심을 통한 지리상 대탐험 시대를 여는데 기반이 된다. 화약의 발명이 기존에 자리 잡았던 패러다임을 완전히 무너뜨리고 새로운 패러다임을 불러 온 것이다.



  4. 결론


  더 이상 전쟁의 관한 연구는 군인들만의 영역이 아니다. 1차 세계대전이 종식된 이후에 군사전문가들은 한결같이 총력전의 중요성을 강조했고, 또한 실질적으로 전쟁은 전국민이 동원된 총력전으로 수행되어 졌다. 중세시대의 기사들의 전투가 낳은 희생자 수는 그 이후 발달된 무기들로 인해 나타난 전투들보다 적었다. 사상자수는 대체로 몇 백 명 정도에 불고했으며, 참혹한 전투에만 천 명 정도에 달했다. 하지만 이후에 화기의 발달로 인해 전투에 임하는 세력간의 무력충돌 거리는 점점 멀어지고, 사상자 수는 곧 수십만 명을 웃돌게 되었다.중세시대의 전투는 단지 기사들의 전투였지만, 총포류가 사용되자 군대의 규모는 더욱 커졌다. 더불어 국토의 황폐화, 민간인의 희생자의 규모도 크게 늘어났다.

  전쟁이 민간인들과의 무관의 영역이 아니듯이 전쟁을 위한 무기도 우리에게 직접적인 영향을끼치고 있다. 주요 열강국가들이 보유하고 있는 전술핵무기의 두려움은, 과거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예와 같이 모두가 느끼고 있다. 당시 히로시마 원폭투하의 결과로 78,000명이 사망하고 10,000명이 실종되었으며 37,000명이 부상을 입었다. 히로시마 시는 60%가 파괴되었고, 2차로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자폭탄은 시가지의 45% 가량을 소멸시켰다.

  핵전쟁이 중세시대를 열었던 등자나 중세시대를 끝내고 절대주의시대를 열었던 화약의 예와같이 정치체계를 송두리째 바꿔버리는 일은 더 이상 생기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들의무기가 단지 단순히 피를 부르는 전쟁의 용도로만 사용되지 않음을 알아야한다.  미국, 러시아 등 익히 알고 있는 나라들을 포함하여 가깝게는 북한의 예가 있다. 북한은 오래전부터 주변 외교국가들과의 협상 테이블에 핵무기를 이용하고 있다. 한국은 북한에게 번번이 페이스를 뺏기며 북한의 정치적 의도대로 따라간다.

  핵무기의 정치적ㆍ외교적 활용을 통한 대외정책은 우리의 삶에 직ㆍ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치기 마련이다. 2006년 10월 9일 이후 북한의 핵무기 실험이 공표되자, 한국 정세에 불안감을 느낀 외국자본의 이탈이 있었다. 북핵문제가 한ㆍ미간의 신뢰붕괴로 이어지자 불안 요인이 증가하여 외국 투자자의 심리적 안정성을 저해하여 빠져나가는 자본을 막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이 새로운 전쟁 무기의 개발은 삶의 변화를 가져온다. 그것은 단지 변화를 가지고 오는 속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과거 등자와 화약은 오랜 시간을 거쳐 천천히 그 모습을 드러내어 진정한 효과를 발휘할 때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러나 전 세계의 세계화가 가속화되고 있고, 하루가 멀다 하고 신기술이 개발되는 현시대에 새롭게 개발된 무기가 어떤 영향을 끼칠지 예측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과거의 역사로부터 배운 사실들을 통해 현재의 시대적 상황을 정확히 조명해 본다면, 그것은 분명히 세계정세와 흐름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 주

1) 클라우제비츠(Carl von Clausewitz). 프로이센의 군인출신으로 러시아군에 투항하여 나폴레옹으로부터의 해방전쟁에 진력하였다. 프로이센으로 돌아온 그는 그나이제나우 장군 휘하의 참모장을 역임하다 콜레라로 사망한다. 그의 대표적인 저서는「전쟁론」: Vom Kriege

2) 이 기간은 최대 18년까지 연장이 가능했다.

3) 당시 인도는 마우리아 제국이 몰락하고 크게 네 개로 분리 되었다. 북부에 자리잡은 숭가왕조(기원전180~80)는 산치를 포함하여 기념비적인 불교단지를 수없이 확장했다. 그중 바르후트의 불탑과 산치대탑에서 발견할 수 있는 기수상은 등자의 원형을 섬세하게 표현하고 있다.

4) francisca, 투척용 도끼. 한쪽에만 날이 세워져있고 날이 등보다 길게 휘어졌으며 안쪽엔 깊은 흠이 패여있었다.

5) Roger Bacon(1220~1292) 철학자, 과학자, 의사. 독일의 힐데가르트 폰 빙엔(Hildegard von Bingen)과 함께 더불어 중세시대의 유명한 의사였다. 하지만 이들은 언제나 마술사, 마녀로 지목될 가능성이 있었고, 실제로 로저 베이컨은 흑마술을 다룬다고 교회에 고발되었다.

6) 동부 로렌 지방.

7) 현재 영국 에덴버러 동쪽에 위치한 당시 스코틀랜드의 중요 요새들 중 하나.

8) 프랑스 북부 지방.

9) 1346년 8월 26일 북부 프랑스 항구도시 칼레 남쪽에 위치한 크레시 지방에서 일어난 전투. 100년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전투로 손꼽힌다. 이 전투에서 에드워드 1세의 보병혁신을 통한 구성인 장갑병의 지원을 받는 장궁병을 이용하여 프랑스의 중갑기병들로부터 크게 승리한다.

10) 1453년 영국이 장악했던 보르도가 함락됨으로써 백년전쟁은 프랑스의 승리로 끝이난다.




■ 참고문헌

1. Maria Angelillo 「India, History and treasure of an ancient civilization」, 이명민역, 2007

2. Carl von Clausewitz 「Vom kriege」 류제승역, 책세상, 1998

3. Edward. E. Burns 「Western civilizations」 박상익역, 소나무, 1994

4. Constance Brittain 「Strong of body, brave & noble」강일휴역, 신서원, 2005

5. Lynn White Jr.「Medieval technology and social change」강일휴역, 지식의풍경, 2005

6. Manfred Reitz 「Das leben auf der burg」이현정역, 플래닛미디어, 2006

7. John Keegan 「A history of warfare」유병진역, 까치, 1996

8. Auther Ferrill 「Origins of War : from the Stone Age to Alexander the Great」이춘근역, 인간사랑, 1990

9. Bernard Law Montgomery 「A history of warfare」송영조역, 책세상, 1996

10. 시오노 나나미 「로마인 이야기 - 제10권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김석희역, 한길사, 1995

11. 심재윤 「서양중세사의 이해」선인, 2005

12. 노병천 「도해세계전사」연경문화사, 1989

Posted by 결여


요즘 부쩍 사람들간에 진지한 대화가 줄어들었다.
이유를 생각해보면 크게 두가지를 들 수 있다.
진지한 대화를 할 꺼리가 없거나 혹은 대화중 생겨나는 상호간의 의견충돌로 인한 피로감을 느끼고 싶지 않거나.

나이를 먹고 어른이 되면 사회전반에 걸쳐 생겨나는 일들에 대해 생각해보고,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들어가면서
자신의 생각을 관철하는 일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것이라 생각했지만 술자리에서 나누는 얘기들은 언제나
야구선수 이대호의 부진이유, 서태지의 복귀, 다크나이트의 개봉 따위와 같은 최근의 이슈가 될만한 것들 뿐이다.

어느샌가 우리의 모든 이야기들은 뉴스, 가쉽거리, 그냥 한번 회자되고 지나칠법한 가벼운 안주거리들로 가득차
있었다. 마치 가볍게 집어먹고 떨어지는 나초칩의 부스러기들처럼 순간순간의 이야기들은 그렇게 잊혀져갔다.

이런 상황은 비단 술자리에서 뿐만이 아니라, 우리가 흔히 접하는 인터넷 포털 사이트들의 메인 화면에서도
흔히 볼 수 있다. 포털에 가장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뉴스란은 일정한 간격을 두고 계속 바뀐다.
끊임없이, 쉴새없이 바뀐다. 방금 금메달을 차지한 선수의 자랑스러운 모습이 나오기도 하고 이명박 대통령의
발언이 올라오기도 하며 자연재해, 유명스타의 스캔들, 불안한 경제상황 등 전혀 연관성이 없는 것들이
한데 묶여 올라온다. 조금의 시간이 지나면 얼마전까지 톱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뉴스들은 언제그랬냐는 양
사라지고 또다른 뉴스들이 자리를 채운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지나간 정보들 위로 새로운 정보들이 퇴적되는
속도는 기하급수적으로 상승한다.

비단 인터넷만 정보의 퇴적 현상이 일어나는게 아니다. TV, 라디오, 신문등 모든 매체들도 마찬 가지다.
TV는 아침부터 새로운 소식을 정보를 던져주는 프로그램들이 끝나면 울고불고 질질짜는 통속극이 나오고,
주부님들에게 도움되는 교양강좌가 끝나면 애들이 보는 만화, 이후에는 가벼운 오락 프로그램, 또다시 드라마,
뉴스, 심야 오락 프로그램의 반복이다. 전혀 연관성이 없는 프로그램들로 구성된 이런 편집들은 수용자로
하여금 한번 더 생각할 수 있는 빌미의 여지를 제공하지 않는다. 무수한 정보속에서 자신이 원하는 것만
챙겨보기에 바쁘다. 조금이라도 자신과 맞지 않는 연예인 혹은 프로그램이 편성되면 리모컨만 돌리면
얼마든지 자신이 원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왜 싫어하는가? 왜 좋아하는가? 따위는 생각하지 않는다. 수용자가
생각하는 것은 리모콘 버튼을 한번 누르는데 소요되는 건전지의 양보다 적다.

인류가 사용하게 된 매체의 역사에서 현재를 100으로 기준하면, 언어체계의 활용은 약 90 정도에 위치한다.
그 이후 활자, 인쇄술, 신문, 라디오, 영화, TV, 인터넷으로 셈하면 점점 그 발달의 간극은 소숫점 아래로 내려가야
겨우내 셈할정도로 좁아지는 셈이다. 이렇게 매체의 발달속도가 빨라지면 빨라질수록, 쏟아지는 정보의양은
브레이크 없는 엔초 페라리가 아우토반을 달리는 속도로 지나쳐 버린다. 결국 인류는 '무엇인가 보기는 했지만
그게 무엇인지 모르는, 혹은 알지만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에 빠져버리고 마는 것이다.

물론 이런 정보를 자신에게 맞춰 활용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대다수는 그냥 정보의 흐름에 몸을 맡기고,
정확히는 쏜살같이 지나치는 정보들에 넋놓고 있을 뿐이다.

더욱 큰 문제는 이렇게 쏟아지는 정보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사실이 되는데 있다. 매스미디어의 사회적
기능중 상관조정기능(해설처방기능)이라는 것이 있다. 이 기능은 매스미디어의 정보전달을 객관적 사실만을
전달하는 Straight news와 사설과 같이 주관과 판단이 들어간 Feature news로 분류하되, 매체제공자들의
성향에 따라 정보제공을 편집하므로써 수용자가 어떻게 받아들이게 할것인가 조절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프로야구의 예로 들자면, 현재 한화vs롯데의 경기에서 1점차로 뒤지고 있는 롯데의 공격일때 9회말 2사 2,3루
에서 타석에 올라온 4번타자 이대호의 득점권 타율은 그 수치만으로도 객관적 사실을 담은 정보가 된다.
하지만 작년 코리안 시리즈에서 3루로 뛰려는 두산 이종욱 선수의 발을 낚아채 안티팬을 양산한 SK 정근우선수를
대상으로(한동안 정근우의 별명은 '부정근우','발근우'였다) 『SK 정근우 '부정'으로 3할타율 도전』과 같은
제목의 기사가 뜬다면 그것이 설사 내용상 부정父情이라 할지라도 대다수의 사람들에겐 제목만으로도 여전히
부정不正으로 인식될수 있다. (물론 기사의 내용은 그의 아들 재훈군에 관한 이야기였다)

일개 스포츠 뉴스만해도 이럴것인데 조중동과 같은 우익신문사나 한겨례, 경향과 같은 좌익신문사에 오르내리는
사설, 칼럼등은 얼마나 심하겠는가? 그들은 상대방의 목소리를 전혀 듣지 않고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기 바쁘다.
눈가리고 귀가리고 입만 뻥끗 열어 목청을 돋운다. 서울역 광장 한복판에서 이러는 사람이 있다면 다들 미친놈
취급하며 제갈길이 바빴을테지만, 얼굴이 보이지 않는 신문너머로 펜끝을 통해 갈겨대는 흰소리는 무리없이
수용된다.

한가지 재미있는 점은 이런 사설, 낚시성 뉴스들이 수용자들을 가리기만 할뿐 남김없이 받아들여진다는데 있다.
우익신문이 쓰는 사설은 우익계통의 인물들에게, 좌익신문이 쓰는 사설은 좌익계통의 인물들에게. 그외에도
많은 정보들이 100이면 100에게 다 동일하게 받아들여질때도 있지만(올림픽 뉴스와 같이), 미국산 쇠고기의
안정성을 논하는 뉴스는 50대 50으로 받아들여질수도 있고, 이명박 대통령의 정책에 관한 뉴스는 10대 90으로
받아들여질수도 있다. 0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모두가 진짜다. 모두가 사실이다. 단지 받아들여지는데 차이가
있을뿐이다.

이러니 진지한 대화가 진행될수가 없다. 모두 사실이니 더 이상 생각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진위여부의 판단은
뒷전이다. 쓰윽 훑어보고 자신에게 사실이면 받아들인다. 자신에게 거짓이면 버린다. 다음 아고라 같이
토론이 활성화된 사이트도 물론있다. 네이버 뉴스사이트에 뜨거운 감자는 아직도 리플이 달린다. 성지순례도
한다. 그런데 리플을 달고 게시물을 작성하는 개개인에게 모두가 사실이니 대화가 진행 될수가 없다.
절대 섞이지 않는 흑과 백의 싸움을 보는 것 같다. 회색은 용서하지 않는다. 마치 그들의 토론은 바둑판을
보는것 같다. 어떤 문제점이 제기가 되면 흑과 백이 치열한 자리 다툼을 한다. 흑의 여론이 우세한가 싶더니
백의 여론이 둘러싼다. 둘러쌓인 흑의 자리는 숨통이 없어서 토론장에서 사라진다. 흰돌이 검은돌을 사방으로
둘러싸면 바둑판에서 띄여지는 것과 같은 모습이다. 바둑돌은 회색이 없다. 모두 제각기의 색깔을 가지고
3, 4-10,8 이런식으로 제 자리만 지키고 있을뿐이다.

대화의 기본은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받아들이고 자신의 생각과 다른 점을 비교하면서 조금 더 나은 의견,
조금 더 좋은 생각으로 발전하는데에 있다. 요즈음 사람들을 보면 모두 각자 자기의 목소리만이 사실이라며
소리지르기 바쁘다. 서로의 목소리는 점점 높아져서 그 무수한 목소리에 뒤덮여 아무런 말도 들을수가 없다.
이러니 진지한 대화를 통한 생각의 관철은 커녕 생각조차 할수가 없는 것이다.
Posted by 결여